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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 관람

헬스가이던스 By 이정현 2023. 11. 25. 21:04

고궁 석조전 관람스토리 👀⤵️
https://jeje0513.tistory.com/m/1018

고궁 석조전 관람스토리

https://naver.me/5780LoVv 서울 고궁투어 덕수궁 돌담길, 석조전 내부 예약관람 후기▪️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시간: 09:00 ~ 21:00(월요일 휴무) ▪️전화: 02-771-9951 ▪...blog.naver.com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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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

석조전관람 중 해설과 사진을 게시하고 되짚어 정리해보았다


석조전의 역사


석조전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김) 이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으로 환궁한지 한 달이 되지않은 1897년 3월에
브라운이 통역관과 함께 경운궁안 지형을 측량했다는
기사가 <독립신문>에 났던 것을 보아 이미 이 때부터
서양식 궁전 건설을 기획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석조전은 지금 중화전의 서북쪽, 준명당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1897년에 건립하여 경술국치해인 1910년에
완공되어,대한제국과 역사를 함께 한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근대에 지은 덕수궁에는 서양식 건물인 양관(洋館)이
여러 채 도입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고 황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지은 서양식 궁전이 석조전이라 할 수 있다.


대한제국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이 건립을 발의했다.
처음에는 경희궁에 지으려 했으나 브라운 권유로
경운궁에 세웠다.



석조전의 특징

동양의 전통 궁궐에서는 정전, 편전, 침전의 기능이 각각 구분되어 있던 것에 비해,
석조전은 서양의 주거 양식을 도입하여 그러한 기능을
하나의 궁전 내부로 통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석조전의 공사 진행 과정

1897년 ~ 1901년  설계 및 기초공사
1903년 ~ 1906년  구조공사
1907년 ~ 1909년  내부공사

석조전의 건립시기의 세계정세
1903년부터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을 먹이로 둔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었다.
그 긴박한 시기에 고종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기 위해 경운궁 내에 석조전을 건축하였다.

석조전의 설계자 -존 레지날드 하딩(J. R. Harding)
하딩은 석조 건물이 낯선 한국인들에게 공사에 앞서 나무로 1/10 정도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1900년 5월 26일자 미국 잡지《아메리칸 아키텍처 앤드 빌딩 뉴스(American Architecture and Building News)》에
저 모형을 실었다.


석조전의 중앙홀

중앙홀은 복층 구조 공간이다.
관람 시 제일 먼저 들어가는 공간으로
2층의 회랑형 복도를 지탱하는 척하는,
기둥 머리가 금박을 입힌 이오니아 양식의 16 기둥이
서 있다.

벽의 내부 장식은, 흰 벽을 금박 입힌 철재 장식물로
장식한 영국식 신고전주의 양식의 인테리어이다.

같은 신고전주의 양식 가구인, 상판이 대리석으로 된 탁자와 의자, 안락의자, 입식전 등이 있다.

탁자는 본래 석조전에 있던 가구 중 현대까지 남아있던
것으로 창덕궁 대조전에 있었다.
그러다 중앙홀에 있던 시절 사진을 확인하여 복원 후
원래 있던 중앙 홀로 옮겨온 것이다.


관람객의 포토죤 / 중앙홀 왼쪽 안으로 대 접견실이 보인다


(진지한 딸아이...빠른해설이 맘에든다고 또 오고싶다고 한다 ...근대 한국사에 진심인 덕후공주같다 :)


귀빈 대기실

고가의 유리는 부의 상징이어서 높게 장식한 인테리어 ... 조명의 반사효과로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었다한다

접견실에서 가장 고가인 물건은 유럽에서 수입된 벽면 거울이었다.
🇫🇷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는 중앙에 거울의 방이 있는데, 당대에 거울은 엄청나게 비싸고 화려한 사치품이었다.


이에 궁전 중심이자 프랑스 중심을 거울로 장식한 것이다. 이는 외국 사신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도배한 거대한 회랑인 거울의 방을 걷게 함으로써 사절단의 기를 죽여 프랑스의 외교적 우세를 확보하기 위한 고단수의 정치적인 장치였다.
거울이 비쌌던 이유는 베네치아의 일부 솜씨좋은 기술자들만 제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스에서 이 기술을 빼내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설이 있다.

석조전 접견실에 위치한 거울들은 유럽에서 장식한 형태로 잘라서 직수입하였고,
장기간에 걸쳐 매우 조심스럽게 운반하였다고 한다.



황실의 면모를 갖춘 대한제국


대한제국 선포

고종은 1895년 경복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를 을미사변을 겪은 후 위협으로 둘러싸인 경복궁을 나와 1896년 러시아 공사 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들어가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새로운 체제를 갖추고자 황제국을 선포하였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에 등극하였다.
새 국호는 고대의 삼한을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대한으로 정하고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황제국의 걸맞게 제도를 정비하였다.
황제의 복식은 조선의 붉은색 왕의 복식에서 황제의 색상인 황금색으로 바뀌었으며
각종 상징과 의장물 역시 황금색으로 바뀌었다.

⬆️ 거울사진을 누루면 [대한제국 선포]의 자세한 내용 링크


대한제국 선포의 의의

국제법상 한 나라의 성립 자체는 선포로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므로 대한제국의 성립 여부는 사실상
다른 나라의 승인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자체는 나라의 체면을 높이자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런 만큼 고종과 정부로서도 각국의 호의적 관심과 승인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 서울 주재 각국 대표에게 이를 알려 본국정부의 승인 여부를 회답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므로 각국 정부도 어떠한 형태로든 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야 할 상황이었다.

ㅡ중략

대한제국 선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그 나름대로 존재한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대한제국의 선포는 우리 나라가 전근대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로부터 탈피했음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란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록 서구 열강에게는 현실적 구속력이 없는 조치였지만, 적어도 한국과 대등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청국, 그리고 소중화의 관념에 젖어 있던 일부의 유생과 다수의 일반에게는 그 자체가 적지 않은 충격과 자극이었다.
전래의 화이관이나 소중화의식이 19세기까지도 엄존하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그것은 나라의 권리에 대한 인식의 획기적 전환이었다.

둘째, 대한제국 선포는 국권이 외세에 잠식되어 가는 고립무원의 절망적 상황에서 안으로는 군주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밖으로는 일본·러시아·구미국가 등 모두의 간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뜻을 내외에 선언한 점에서 현실적 의미가 있다.

동학농민군의 구호였던 ‘斥倭洋倡義’, 의병의 구호였던 ‘斥邪衛正’, 독립협회의 국권수호운동이나

≪독립신문≫·독립문의 명칭에 담겨있던 ‘自主獨立’의 표어와 넓은 맥락에서는 같았다.


외압에 대한 대응의 방식은 각 집단이 상이했지만,
국가의 자주독립을 열망한 점은 조야 모두가 같았던 것이다.     출처 :  https://naver.me/5jmZp1PR



헤이그 특사

🇺🇸 미국 대통령 테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의 제안으로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총 44개국 대표가 참석하였고,
전쟁에 관한 규칙과 중립 및 중재에 관한 내용 등을 담은
13개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1907년에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를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대한제국 특사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특사들은 현지 언론을 대상으로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상을 고발하였다.

한편 이준은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현지에서 사망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純宗, 재위 1907~1910)을 즉위시켰다.


귀빈 접견실


중앙홀 위쪽에 위치한 방. 1층 방들 중 가장 큰 방이다.
황제를 폐현하는 곳으로, 다른 방들과 달리 황실 문장인 이화문을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화는 이화여자대학교 상징인 배꽃이 아닌 자두꽃(오얏꽃)이다. 중앙홀과는 인테리어가 같으나
가짝 기둥 2쌍과 기둥 2쌍이 있는 것이 다르다.


카페트 위로 여러 의자와 안락의자, 장의자, 협탁 2개,
원탁 2개, 입식 전등을 배치하였다.
기둥 위 이화문들은 모두 실제로 도금한 것이며,
이외 금색 장식은 칠을 한 것이다.

폐현은 황제께 나아가며 총 세 번 몸을 숙여 인사를 하며 나아가고, 뒷걸음으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외국 사신들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럽고 어려운 절차였다고 한다.

특별전이 있을 때에는 가구를 모두 치운 뒤 대형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다른 공간에 비해 천장이 낮다.
한국전쟁 당시에 내려 앉았기 때문이다.

장식한 금이 아니라고한다 / 힘든시기 불가능했을 것라고...🌸꽃문양은 오얏(자두나무)꽃 이씨를 상징한다
다양한 각도에서 많이 찍었다 // 석조전 내부는 영상촬영이 불가하다




황후의 거실

황후가 책을 읽거나 내빈을 접대하는 방이다.
전통적인 안방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황후가 사용하는 공간이기에 다른 방보다 가구가 화려하다.

황제의 거실 좌측에 있으며, 황제의 서재보다 규모가
약간 작다.
인테리어는 황제의 거실과 비슷한 편으로 카페트 위로 책장, 책상, 원탁, 의자, 장의자, 장식장 등이 있다.
이 중 준공 당시 가구는 책장과 책상, 원탁, 장식장이다.

중앙에 위치한 원탁 위에는 영국의 웨지우드 사에서 제작한 티팟 세트가 있다.

가비(커피)향이 그윽하게 베어 있을것같은 단아한 찻잔세트


2층복도에서 내려다 보면 멋지다


대한제국 황실의 가계


사진기와 서양식 복식이 유입되면서 대양제고 혼실에도 영향을 미쳐 서영식 폭식을 착용한 황실 가족 사진이 다수 남아있다.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과 순종은 전통 복식인 공룡포를 착용하기도 했지만,

군복을 입거나 서양식 군복을 입거나 서양식 훈장을 달고 있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황제의 침실

서쪽 계단 기준으로 좌측에 있다. 정작 나라가 망한 이후 완공하였고, 무엇보다 고종은 오랫동안 온돌을 기반으로 한 좌식에 익숙했기에 함녕전에 계속 기거하였다.

순종 역시 창덕궁에 살았기에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영친왕이 간간히 귀국할 때만 사용하였다.

벽면의 인테리어는 소식당을 제외하면 같으며 카펫 위로는 침대를 포함해 옷장, 세면대, 의자, 안락의자, 협탁 등이 있다. 이 중 옷장과 세면대는 원래 침실에 있던 것을 다시 배치한 것이다. 황제의 침실이기에 커튼과 소파의 덮개, 침대의 이불자리 등의 색상이 황금색이다.

황제의 침실을 황제의 서재, 황후의 부드와흐(규방), 황후의 침실, 2층 중앙홀과 차례로 연결하였다. 유럽의 궁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형 구조이다.
이런 왕족의 주거 구조를 현대에 아파트를 만들 때 접목시켰다.



그 시절엔 거울은 부의 상징이라 상징적 인테리이이다 높게단이유이고 등에 비추어 조명연출하였다고...


황제의 서재

황제의 침실 좌측에 있다.
전통 개념의 사랑방같은 공간이다.

황제가 책을 보거나 별도로 손님을 맞이하던 곳으로 1911년에서 1918년 사이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카페트 위로 책장, 회전서가, 게임탁자, 원탁, 책상 등을 배치하였다.

중앙 원탁 위에 있는 책은 당대 국제법 기초 서적이었던 만국공법이다. 고종황제는 외국 사신들에게 이와 같은 외국 서적들을 부탁하여 입국시 3 ~ 4권 정도씩 가져오게 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고종황제의 행보를 보면, 비록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을 위해 자주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군주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황제의 서재에는 두께감있는 한권의 외국서적이 놓여져있다 만여권 넘는 책중에서 외국서적은 천여권 남짓하다


황제의 욕실과 화장실


황제의 서재와 황후의 거실 아래에 위치한 공간들이다. 복원한 화장실 / 욕실은 복원이 한참 진행 중일 때 발견한 평면도에서 해당 위치에 타일이 있다는 근거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성을 구분하는 법도에 따라 황제와 황후 전용을 따로 두었으며, 화장실과 욕실 또한 각각 다른 공간으로 분리하였다.

대한제국에서 수세식 좌변기가 최초로 설치되었다. 그 당시 고종 황제의 황실로 사용되는 건물에 영국식 수세식 변기[3]가 설치되었다.

황제와 황후의 화장실/욕실 디자인은 대체적으로 같다. 변기나 욕조, 세면대 등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쓰던 것들을 그대로 들였다.


황후의 거실

황후가 책을 읽거나 내빈을 접대하는 방이다.

전통적인 안방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황후가 사용하는 공간이기에 다른 방보다 가구가 화려하다.

황제의 거실 좌측에 있으며, 황제의 서재보다 규모가
약간 작다. 인테리어는 황제의 거실과 비슷한 편으로 카페트 위로 책장, 책상, 원탁, 의자, 장의자, 장식장 등이 있다.
이 중 준공 당시 가구는 책장과 책상, 원탁, 장식장이다.


중앙에 위치한 원탁 위에는 영국의 웨지우드 사에서 제작한 티팟 세트가 있다.


황후의 욕실과 화장실

세면대는 큰 대야에 대형 저그가 겹쳐져 있는 형식으로 요즘의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세면대와 다르다.

이는 수도관이 들어오기 전에 유럽 왕실에서 사용하던 방식이다. 황족이 대야에 손을 대면, 위에서 시종들이
물을 부어주는 식이었다. 이를 감안해서 세면대 탁자 상판 부분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나무일 경우 물이 튀어 썩기 쉽기 때문이다. 경복궁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에도 이와 같은 세면대가 있는데, 빌레로이앤보흐 사 제품이다.


황후의 침실

황후의 침실은 석조전 설계 단계부터 사실상 고종의 황후 역할을 하던 황귀비 엄씨의 침실로 기획하였다.
그런데 석조전을 경술국치 이후 준공하였고,
직후 순헌황귀비가 장티푸스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데다,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마저 남편을 따라 창덕궁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기에, 이 방은 이왕비였던 이방자 여사가 남편 영친왕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에 가끔 올 때만 사용하였다.(1922년 ~ 1924년)

가구 구성은 황제의 침실과 거의 같다.
단, 황후의 침실이라 그런지 카페트 위로 화장대가 있는 것과 커튼이나 방석이 자주색인 것이 다르다.
준공 이후 배치했던 옷장, 세면대, 화장대, 책상을 복원하면서 다시 놓았다.


흑백사진의 상태에 따라 복원기술이 다르지만 자주색상이라는 정도로 알아내서 복원했다고한다


2층의 테라스


2층복도에 게시된 석조전 관련
역사속 인물과 외관사진


석조전의 대식당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고급스러운 식탁보, 식기 등으로 관람객들의 이목을 끄는 화려한 방이다.

중앙홀 좌측방으로 공식적인 행사 이후 참여자들에게 서양식 만찬을 베풀던 공간이다.

긴 식탁과 여러 개의 의자를 두었다. 배치해 둔 식기들은 그 당시에 실제로 사용하던 것들과 복제품이며, 황실 문장인 이화문이 새겨져 있다.
여담으로 복제품을 만든 회사는 행남자기사이다.


소식당도 있는데...관람못함




다른 공간과 달리 유일하게 내부 복원이 덜 이루어진 공간이다.
복원 공사 도중에 발견했던 배관 시설의 일부를 놔둔 후
그 앞에 불투명 유리를 두어 관람 시에 해설 요원이 버튼을 눌려 보여줄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석조전이, 외관은 화강암 재질이지만 사실 벽돌과 철골 등으로 지은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불투명유리에 조명으로 볼 수있다



출처
글 네이버 나무위키
그림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자료집 [덕수궁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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