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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예술인가

헬스가이던스 By 이정현 2022. 12. 1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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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예술인가

미학자이자 평론가인 아서 단토의 유작. 무엇이 예술작품이 되는지에 대한 근원적이고 복잡한 문제를 다루는 이 책은 예술이란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기존의 해석에 도전하며, 하나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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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예술인가> 북리뷰
- 아서 단토 (은행나무, 2015)
현대 미술에 관련된 책을 이것저것 뒤져 보게 되면,
이제 주류는 미적 상대주의가 득세하는 것 같다.

현대 미술이 경쟁적으로 기존의 것에 대한 일탈을 추구하는 역사적 궤적을 통해, 칸트가 말한 ‘공통 감각’에 해당하는 미적 보편성을 정의 내리거나 규정하기가
힘들어 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편성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무엇이었나?
억압되었던 개별자들의 다양하고 풍성한 미적 범람이었을까?

부단한 새로운 형식 실험을 통해 미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었을까?

문외한이라 그 분야의 전문가적인 식견은 없지만,
그다지 풍성하고 풍요로워진 쪽은 아닌 걸로 보여 진다.

오히려 의미 있는 미술사적 사건의 무대가 공통적인 보편적 토대의 소실로 인해, 그럴싸한 말빨들의 대결,
현대 철학의 난해한 개념을 전유하면서 있어 보이려는 노력들,

또한 이것을 가능케 하는 미술 카르텔끼리의 짜고 치는 놀음판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어떤 것이 미적인 것이며, 어떠한 것이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으며, 어떤 작품이 근사한 것일까? 라는 질문.

미술판에서나 미학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일관되게
뭔가를 논파하려고 좀처럼 누구도 나서기 주저하게 되는 포스트모던 어쩌구의 세상.

그 세상은 해방된 세상이 아니라 자의적인 유아론적
미적 자유의 추구들 속에 머물며, 물신주의의 핵에
가까이 가고자하는 시장주의적 인정투쟁에 삼켜진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있다.


30대 중반부터 전시회를 찾아 미술작품을 보러 다니고, 그러다가 우연히 기회가 되어 몇몇 미술작가들도
참여하는 호모루덴스 미술모임을 꾸리고, 같이 몇 년 미술공부도 하면서, 점차 이런 식의 막연한 책상머리 생각을 했었다.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폄하와 디스는 물론 동의하지 않지만, 또한 플라톤주의에 대한 반대가
(마치 획일주의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처럼) 공고하고 부인할 수 있는 정답처럼 통용되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

요령부득의 플라톤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그는 학문의 가능성을 정초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 수평적으로 각자에게 옳은 것이라면, 모든 궤변도 인정해야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는 적어도 진리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의견 중에 좀 더 옳은 것을 있을 가능성을 욕망했고, 그것을 철학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정초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학문의 가능성이다.
좀 더 나은 것이 있을 가능성이 없다면, 뭐하러 고생하며 공부하고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옳고 그름을 따지겠는가.

(물론 이런 ‘의견의 위계성’의 정도는 분야마다 매우
다를 것이다. 가장 진한 농도는 hard science(물리학, 화학, 분자생물학 등)에서 가장 옅은 농도는 문사철 인문학일 것이다)

하여튼 이런 식의 문제감에서, 아서 단토가 이 책에서 추구하는 노력이 근사해 보인 것이다.

서문에서 그는, 예술사를 보면 예술의 가장 우선적인 특징이 없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고(많은 사람이 이런 태도에 동의한다), 잘 해야 열린 개념에 불과하다는
식의 태도에 과감히 반대한다.

다양한 형식의 예술이 왜 보편적인지를 설명하는
성질들이 예술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정의내릴 수 있는 닫힌 개념이라는 것이다.
과연 가오 있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시도라 볼 수 있겠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의 개념적 기획의 대상이,
주로 모던 아트 이후의 예술만이 아니라 재현
(모방을 통한 시각적 진실에 대한 추구)에

연연하는 전근대 미술까지 포괄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통 큰 접근이라 할 수 있지만,

인류사의 독특한 ‘모더니티’라는 기묘한 양태를 그전의 이질적 행동양태와 통합하려는 시도라는 면에서,
그 접근 방식의 결과물에 우려를 낳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외연과 내포의 길항관계 때문이다.
외연이 너무 커지면 내포하는 바가 너무 부실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아서 단토의 시도는 예술의 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어떤 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안다는 것,
그것의 구분점을 개념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질질 끌지 말고 바로 가보자.

사진의 등장으로 제대로 된 모방이라는 미술의 과제가
물 건너가고, 1970년대 전통적인 화가의 재료를
외면하고 화가들이 무엇이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일상적 생활세계에 속한 물체와 물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예술과 예술 아닌 실물을 어떻게 구분하는가의 문제가 부상했다.

단토는 이 중에 특히 1915년의 마르셀 뒤샹과 1964년의 앤디 워홀에 주목한다.

뒤샹의 다다이즘과 워홀의 팝아트 모두 사람들이 예술의 본질과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했던 조건들을 예술의 개념에서 제거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경계는 어디인가? 어떤 것이나 예술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구분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시도한 역사를 저자는 소개한다.

1956년에 모리스 와이츠는 <미학에서의 이론의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예술’이 열린 개념이라고 주장 했고, 백과사전식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들의 다양성을 생각하면 그의 주장은 직관적으로 옳게 느껴진다.

1960년대 철학자 조지 디키는 예술제도론을 전개,
무엇이 예술인가에 대한 판정은 전적으로 예술계라
칭하는 세계에서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계는 큐레이터, 수집가, 미술평론가, 예술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삶이 예술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소셜 네트워크다.

단토가 보기에는 와이츠의 열린 개념은 일종의 반본질주의이며 지적 무능으로 보는 것 같다.

또한 디키의 예술제도론에 대해선 캐나다의 세관직원들이 국립미술관장에게 레디메이드가 조각품인지 아닌지를 문의했을 때, 전문가인 미술관장이 레디메이드는 조각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 것을 예로 들면서,

단순히 미술계의 소셜 네트워크에 속한 사람들의 발언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음을 예로 들면서 그 한계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단토가 말하는 예술작품의 고유한 특성 2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1) 예술작품은 어떤 것에 '관한' 것이다.
2) 예술작품은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의미를 추론하거나 파악하지만, 의미는
전혀 물질적이지 않다.

의미는 그것을 담고 있는 사물로 구현된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구현된 의미'이다.


단토는 계속 말한다. 철학자들이 예술품들 사이에 공통되는 특성이 전혀 없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특성을 찾고 있었다고.

어떤 것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특성들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정의는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는지 또는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상관없이 예술품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예술적 성질을 포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단은 끄덕여지는 단토의 예술작품의 정의이지만,
한두 발자국 떨어져 그 개념을 바라보면,

그것이 전근대와 근대와 현대 예술을 포괄하는 공통개념이긴 하지만,
그가 정의한 바가 비단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성찰적 행동 일반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눈치
챌 수 있다.
(예술과논하다:소모임 /Jstory글 옮김)

그 일반 행동에는 당연히 철학도 문학도 포함될 것이고 누군가의 성찰이 담긴 일기장도 그에 포함될 것이고,

역사학이나 정치학 어쩌면 경제학도 과학도 건축도 해당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성찰적 행동 양태가 포함되고 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단토는 야심차게 예술을 존재론적으로 정의를 내리고자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지나치게 헐렁한 변별되지 않은 개념 제시에 그치고 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작업이 칸트처럼 예술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단지 몇몇 필요조건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다. 또한 미술은 본질적으로 미술사적이다, 라고도 말했다. 철학의 정합적 언어로서는 아마도 미술의 본질을 일부만 캐치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역사는 우연적이며, 그 선행하는 우연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정의되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로서 아서 단토가 예술을 존재론적으로 정의 내리려는 작업의 결과에 대한 나의 딴지가 단지 사족에 불과했음을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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