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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이란

헬스가이던스 By 이정현 2022. 12. 26. 02:56

한해의 마무리 하느라 분주해지는 월요일!
🏹활기찬 한주 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2UUWA08-d4I

오십에 읽는 논어...를 읽다보니
공자...그가 궁금해졌다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이는 공자(《논어》)의 仁者 愛人
('인'은 남을 아끼는 것이다)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식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배려하고 걱정하는 등,
조건없이 남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이
"사람다움"의 본질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배신 속에서
죽었기에 '남을 챙기고 아끼자.

그래서 사람답게 살자.'는 공자의 외침은
당시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크고 작은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되는데,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혀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장(長)이 된다.


이로써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생기게 되니,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어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배운다.

공자는 이러한
상하관계에서의 올바름을 '의'(義)라고 하여,
공정하고 의로운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그 사회가 안정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오십에 읽는 논어
독서영상필사노력 By lee jeong hy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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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읽는 논어 독서영상필사노력 By lee jeong hyun  : 모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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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주변 친한 사람을 챙기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하관계의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순서가 없으면 미숙한 아랫사람이 그 미숙함으로
윗사람을 우습게 보아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친하더라도 거리를 지키게 하고 상하관계에서는
순서를 따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을 '예'(禮)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인(仁)한 사람은 결국 높은 자리로 나아가
의로움(義)을 펼치며,

이러한 인(仁)과 의(義)의 적절한 순서를 지키자는
것이 예(禮)가 되는 셈.

꾸밈과 바탕이 모두 좋아야 명품이다
//균형 [오십에 읽는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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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과 바탕이 모두 좋아야 명품이다 //균형 [오십에 읽는 논어] : 모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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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영상필사노력/By Lee jeong hyun ⬆️

여기서부터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 등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공자는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이러한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았으며,


예악을 따르는 인군(仁君)을 일으켜 주(周)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정치는 인(仁)을 갖추고
예(禮)에 밝은 군자(君子)[10]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뼈대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11][12] 발전시켜온
일련의 사상계 (思想界)를 우리는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른다.

오늘날 세간에서는 보통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 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공자는 자신이 무언가의 창시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공자는 다만 스스로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예악(禮樂) 전통을 정리하고 계승했을 따름이며,
자신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 성왕(聖王), 성현(聖賢)의 행적에 깃든 참뜻을
밝혀낸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은 아니다."는 말은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의 사상을 잇는
것이었다.

실제로, 흔히 유교 문화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공자 이전부터 있었거나 혹은 나중에 가서야
형성된 관습들이 많다.

또한, 공가(孔家)라고 부르지 않고,
유가(儒家)라고 부르는 것도 후대의 학자들이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