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공감의 품격/
게시글 낭독 By Lee jeong hyun
https://youtu.be/hs8jwLeILmc
우리는 동시대에 살아가기에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가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고, 가족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다른 시선에서 보자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본인의 착각일 뿐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하는 것과 개인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생활하는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경험한 경우 타인의 생각에 토를 달지 않는 것에
익숙하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상대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상대의 지위, 성별, 능력등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한다.
굳이 불편해질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런 경우 사회생활 잘한다고 한다.
십인십색 각인각색(十人十色 各人各色)이지만
다름을 표현하지 않는 지혜가 사회생활이라는
미명하에 적용되는 셈이다.
현명한 태도인 듯하다.
사회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같이 바보되는 것이
현명할 가능성이 높다.
이보다 편한 삶을 보장하는 처세술이 또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처세술에 익숙해지면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자신의 생각을 잊고 맞추는 것에 급급해진다.
편한 삶에 익숙해진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좋지
않은 문화에 익숙해진다면 문제가 된다.
개인이 망가지겠지만 편함에 익숙해져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험실 비이커(beaker)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개구리가 삶아져 죽을 때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황일 수 있다.
물론, 삶아지는 개구리는 이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세상은 그 사람이 바라보는 그림일 뿐 실제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error of generalization)'.. 이 흔한 말을 우리는
삶속의 가훈이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같이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변명하기에도 바쁜 삶이다.
생각하며 살지 않은 댓가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One must live the way one thinks or end up thinking the way one has lived.)
말한 폴 부르제(Paul Bourget)의 말처럼
그리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생각을 좌우하는 건 간단하다.
‘PR의 아버지’ 또는 ‘정보조작의 대부’로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와 지배 엘리트의 의지대로 대중을
‘자발적 복종’의 길로 들어서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기초를 놓은 사람이었다.
물론, 대중은 본인들이 선택했다고 생각하며
복종한다. 충견(忠犬)인 셈이다.
세상은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상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언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서로 마주하고
다른 이야기를 나눌 가능성마저 발생한다.
우리는 상대가 보는 세상을 같이 볼 수 있어야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인생은 그 사람의 눈높이와 같다.
십인십색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일반화하는 어리석음은 우격다짐을 벗어나지
못한다.
미술 기법중에 별개의 조각들을 모아 붙임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콜라주(collage)가 있다.
그림도 좋고, 사진도 좋고, 헝겊, 타일, 실물의
어떤 것들도 좋다.
그것들을 모아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충분하다.
콜라주 기법은 피카소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인데,
이는 입체파로 불리는 그의 큐비즘(cubism)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들(시선들)을 모아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큐비즘과 콜라주는 같은
기법이다.
피카소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인 셈이다.
사람들이 피카소에 열광하는 이유기도 하다.
정물화가 전부인 이에게 큐비즘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가 좋아하는 정물화의 일부를 찢어내 콜라주한다면 화를 낼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미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물에 만족하는 개구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물 안 세상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일 것이다.
우물밖에 대한 대화는 나오려 시도하는 개구리로
충분하고, 비이커(beaker)를 벗어나려는 개구리로
충분하다.
이런 시선의 연장선으로 독서 역시 마찬가지다.
고집하는 사람와의 대화는 불필요하다.
공감으로 충분하다.
모든 만남에 방향성은 있겠지만 지혜는 다정함과
사회생활을 포함할테니 과하면 좋지 않을 수 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어쩌면 다정함과 지혜는 진화론이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체격이 작은 보노보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물어야 한다.
당신에게 독서는 무엇인가?
책을 읽는 교양인이라는 뿌듯함인가?
책속에 등장하는 글귀를 찾는 보물찾기,
혹은 자신의 생각을 지지할 내용을 골라 찾고 있는
채굴꾼인가?
아니면 자신을 넘어서는
위버멘쉬Übermensch)의 과정,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전인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