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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용어)질료와 형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

헬스가이던스 By 이정현 2023. 9. 9.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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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료(質料, matter, hyle)와 형상(形相, form, eidos)

질료와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질료란 무언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태(dyna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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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료와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질료란 무언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태(dynamis)를 의미하며 형상이란 질료를 통해 만들어진 현실태(energeia)이다. 가능태와 현실태, 질료와 형상은 상대적이다. 질료는 형상이 될 수 있는 가능태이며 형상은 질료의 현실태이다.



예컨대 씨앗이 질료라면 나무는 형상이다. 나무가 질료라면 통나무집은 형상이다. 통나무집이 질료라면 통나무집 마을은 형상이다. 반대로 통나무집 마을이라는 형상의 질료는 통나무집이며, 통나무라는 형상의 질료는 나무, 나무라는 형상의 질료는 씨앗이다.



가능태로서의 질료는 여러 현실태가 될 수 있다. 가령 나무라는 질료는 통나무집이라는 형상이 될 수도 있고 이쑤시개라는 형상이 될 수도 있다. 나무라는 질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통나무집이라는 형상에 따라 만들면 통나무집이 되고 이쑤시개라는 형상에 따라 만들면 이쑤시개가 된다. 온 세상의 만물들은 모두 이렇게 질료와 형상의 복잡하고 다양한 결합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Idea)라는 궁극적 세계를 상정하고 현실을 부차적인 것, 부족한 것으로 여기는 자기 스승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현실의 모습을 긍정하기 위해 질료와 형상이라는 설명방식을 도입하였다. 현실은 질료와 형상의 다양한 결합을 통해 위계적으로(hierarchic) 질서 있게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면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어떤 형상의 가능태를 계속해서 아래로 추적해 간다면 결국엔 최종적인 질료에 도달할 수 있고 또 반대로 어떤 질료의 현실태를 계속해서 위로 추적해 나가면 결국 최종적인 형상에 도달할 수 있게 될 텐데 그런 최종적 질료와 형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질료, 즉 어떠한 형상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가능태만 지닌 것을 제일질료라고 규정한다. 반대로 궁극적인 최고의 형상, 즉, 어떠한 질료도 지니지 않은 채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순수형상(entelecheia)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 둘은 모두 현실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개념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을 두는 것은 순수형상이다. 제일질료는 그의 관심 밖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세상의 궁극적 모습은 무엇인지, 세상이 어떤 목적에 따라 만들어졌는지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을 목적론적(teleological) 철학이라고 한다. 온 세상을 이루는 궁극적 질료를 파고들었던 그의 선배 자연철학자들과는 관심사가 완전히 다르다.



과연 순수형상은 어떤 모습일까? 질료 없이 순수하게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최후의 현실태는 무엇일까?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되어 있는 온 세상 만물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순수형상이란 결국 신(God)이다. 신이라는 형상에는 질료가 없다. 온 세상은 결국 신이라는 형상을 추구하면서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된다.



통나무집 마을은 대전시 용운동이라는 형상에게는 질료가 된다. 대전시 용운동은 또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형상의 질료가 된다. 대한민국은 지구라는 형상의 질료가 되며 지구는 우주라는 형상의 질료가 된다. 우주는 궁극적으로 순수형상의 질료가 되며 순수형상은 어떠한 또 다른 형상에 대해서도 질료가 되지 않는다. 그걸로 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이원론적 이상주의에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순수형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플라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통찰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