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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정신의 철학자 /헤겔

헬스가이던스 By 이정현 2023. 9. 23. 23:01

헤겔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요약

헤겔은 모든 사건에 숨은 본질을 절대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상적인 공동체는 개인과 사회의 자유가 함께 실현되는 사회였고, 이 공동체를 '인륜'이라 불렀다. 대표작 《논리학》에서는 모든 현실과 역사 전개 과정을 변증법으로 파악하며 독자적인 이론을 펼쳤다.

본문

“진리는 언제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된다.”


- <헤겔 전집> 속지에 적힌 소포클레스의 말
“철학자로 태어나다니 신의 저주를 받은 거야.”

- 헤겔의 불평

수업 못하는 교사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뷔르템베르크 공국(지금의 독일 남서부 지역)의 수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난세에 영웅 난다’고 했던가. 그의 생애도 혼란의
시대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가 태어난 해에 ‘질풍노도 운동1)’이 일어났고,
학생 시절에는 미국 독립 선언2),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으며,
장년기에는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었다.

들라크루아의 대표작이기도 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듯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그린 그림은 아니다. 대신 이 그림은 1830년의 7월 혁명을 그린 그림이다. 1830년의 7월 혁명은 나폴레옹 패망 이후 왕정복고를 통해 즉위한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민중의 왕", 또는 "인민의 왕"이라고 불리우던 루이 필립을 왕으로 즉위시킨 사건이다. 하지만 루이 필립 역시 1848년의 2월 혁명을 통해 다시 폐위되고, 프랑스는 2차 공화정의 시대를 맞게 된다.


말년에도 프랑스 7월 혁명3)으로 시작된 자유 진영과
보수 진영 사이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혼란의 시기에 그는 때때로 힘든 일을 겪긴 했지만 그렇다고 극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시대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그 속에 감추어진 본질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헤겔의 삶은 매우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고위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별 고생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고, 다섯 살 되던 해 라틴어 학교에, 일곱 살 때 김나지움(우리의 중 · 고등학교에 해당)에 입학했다.

김나지움 시절 그는 여러 분야에서 상을 타는 모범생이었다. 이 시절 이미 그에게는 대철학자의 자질이 엿보였다.

하루에 일어났던 일과 그 일의 의미, 자신의 느낌 등을 일기에 꼼꼼히 정리했다.
읽은 책은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색인표까지 만들었다.

수많은 자료를 솜씨 있게 다루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의 연구 방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영리하고 지적인 학생
헤겔은 운동신경이 둔해 체조, 무술은 아주 못했다.

또 발표 실력도 형편없어 작문 낭독 시간이면 항상 발표
태도나 음성 때문에 지적받곤 했다.

그의 말솜씨는 나중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늘그막의 헤겔에게서 강의를 들었던 어떤 학생은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금 언짢은 듯 머리를 낮게 숙인 채 몸을 움츠리고
앉아서 커다란 노트를 앞뒤로 넘기고 위아래로
훑으면서 계속 말을 하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말은 끊임없는 헛기침으로 계속 끊겼다.
그래서 문장들은 따로따로 떨어지고 뒤죽박죽
섞이기도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요즘 같으면 수업 못하는 교사로 쫓겨나기 딱 좋은
사람인 듯싶다.

그러나 헤겔이 억센 슈바벤 지방 사투리로 아주 힘들게
조각조각 발음하는 단어에는 깊은 존경심을 자아내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어려운 문체도 학생 시절에 이미 만들어진 듯하다.

헤겔은 대부분의 책을 독일어로 썼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그의 책은 ‘헤겔어’로 쓰여졌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한다.


그만큼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가 학생 시절 쓴 일기장에는 이미 헤겔어의 조짐이
보인다.

열여덟 살 되던 해 헤겔은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3등으로 입학했다.

여기서 철학자 셸링과 천재 시인 횔덜린을 만났다.
뒷날 거물급 인사가 된 이 셋은 1년 정도 한 방에서 같이 생활했다
.

이들을 함께 묶었던 끈은 헤겔이 열아홉 살 때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혁명이 내세웠던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은
세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들은 혁명을 기념하여 축배를 들었고
(헤겔은 죽을 때까지 바스티유 감옥이 파괴되는 날을
기념하며 축배를 들었다),
프랑스인들을 흉내 내어 튀빙겐 숲에 ‘자유의 나무’를
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늙은이라는 별명답게 혁명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았다.
열정을 갖고 신중하게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남들은 젊은이다운 가벼움으로
혁명의 열정을 곧 잊어버렸지만,
헤겔은 노인 같은 집요함으로 이 열정을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이 시절 헤겔의 관심은 전공인 신학보다는
조국 독일의 낙후된 현실에 있었다.
혁명의 새 시대가 왔는데도 독일은 자유, 평등, 박애 같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수백 개의 제후국으로 나뉜 후진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바람직한 상태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에 이르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고민 끝에 쓴 책이 《민족 종교와 기독교》이다.
이 책에서 그는 민족정신을 아들에 비유했다.
그리고 민족정신의 아버지는 시대 · 역사이며,
어머니는 정치이다.

유모, 곧 아들의 교육자는 종교이고 예술은 유모의
보조 역할을 한다.
그는 이런 비유를 통해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철학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793년 헤겔은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목사가 되지는
않았다. 신학보다는 철학에 더 관심이 많았던 까닭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대학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도 숱한 박사들이 교수직을 얻지 못해 시간강사로
전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독일 학자들도
교수로 자리 잡기가 무척 힘들었다.

칸트가 9년 동안 가정교사 생활을 했던 것처럼
헤겔도 7년을 프랑크푸르트와 스위스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학자로서의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그러다 마침내 1793년 셸링의 초청으로 예나 대학의
사강사로 초빙되었다.

나는 절대정신을 보았다
그때 예나 대학은 셸링, 피히테, 실러 같은 유명 철학자들이 모여 있는 철학의 중심지였다.

헤겔은 이곳에서 13년을 보냈는데,
그의 대표작 《정신 현상학》은 이 시기에 쓰였다.

책에서 헤겔은 논리학, 과학, 신학을 꿰뚫는 거대한 철학
체계를 구상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과 다르게, 프랑스 혁명을
‘어떤 내실도 갖추지 못한 죽음, 분열이고 양배추 대가리를 둘로 동강 친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그가 비판한 것은 현실로 나타난 무질서였을 뿐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혁명의 의미도 모르고 날뛰며 약탈과 착취를
일삼았고, 혁명이 가져올 사회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흥분하고 열광했다.
하지만 헤겔은 혁명의 본질적인 면을 파악하려 애썼다.

모든 사건에는 본질적인 면이 숨겨져 있다.
헤겔에게 그 본질적인 면이란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이고,
인간의 역사는 이 절대정신이 그 본질을 점차 분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절대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다.
역사는 이성적인 자유를 점차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고대 국가에서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서양 중세에는 군주뿐만 아니라 봉건 제후들도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미지 갤러리 가기
그런데 역사의 발전은 절대정신이 아닌, 몇몇 뛰어난
영웅들의 활약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웅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절대정신이 이들을 조정하고 있다. 즉 헤겔은 절대정신이 영웅을 선택해 자신을 실현시킨다고 본 것이다.


《정신 현상학》이 완성될 무렵, 나폴레옹의 군대가 예나를 침공하고 있었다. 헤겔은 나폴레옹 군이 예나 광장에 피운 모닥불을 바라보며 이 책을 매듭지었다.

그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 예나에 입성하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감격에 겨워 ‘말을 탄 절대정신(세계정신)을 보았다’라고 적었다.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로 확대한다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등에 업은 나폴레옹은 그에게 절대정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반-합’의 변증법

안타깝게도, 그 절대정신은 헤겔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군은 헤겔의 집을 약탈하고 대학을 폐쇄했다.

그 바람에 헤겔은 직장을 잃었다. 실업자가 된 철학자는
또다시 생계 수단을 찾아 여러 곳을 떠돌아야 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잠시 밤베르크에서 신문 편집 일을 했던 그는, 1806년 뉘른베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초빙되어 그곳에서 8년을 보냈다.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면,
헤겔의 성격은 우리나라 경상도 남자 기질과 비슷했던
듯싶다.
그의 출신지인 슈바벤 지방 사람들은 소박하고 인내심이 강하나 황급하고 때론 괴팍하다고 알려져 있다.


헤겔 자신도 무뚝뚝하고 과묵했을뿐더러 일단 화가 나면 상대방이 부들부들 떨 정도로 격정적인 성격이었단다.

이런 성격이었으면서도 마흔한 살의 김나지움 교장 헤겔은 스무 살 꽃다운 처녀 마리와 결혼했다.
무엇이 처녀의 마음을 끌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결혼으로 헤겔은 안정을 찾았다.

이듬해, 두 번째 대표작인 《논리학》을 출간했고,
이 책의 명성 때문인지 1816년에는 꿈에 그리던
정교수가 되어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초빙되었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모든 현실과 역사의 전개 과정을 ‘유(有)-무(無)-생성(生成)’의 원리인 변증법으로 파악하면서 독자적인 이론을 펼쳤다.

변증법은 정(긍정)-반(부정)-합(부정의 부정)의 형식이다.
‘이 컵이 둥글다’가 정명제라면, ‘이 컵은 둥글지 않다(장방형으로 보인다)’는 반명제가 된다.


마침내 ‘이 컵은 둥글다’와 ‘이 컵은 둥글지 않다
(장방형으로 보인다)’는 ‘이 컵은 원통형이다’라는
합명제가 된다.

정명제는 반명제에 의해 부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명제가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반명제는 오히려 정명제를 더욱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합명제는 정명제와 반명제의 내용을 종합하여
더 확실한 사실을 보여 준다.

변증법의 성격은 이렇듯,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며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그는 세 번째 대표작 《엔치클로페디》도 출간했다. 엔치클로페디는 영어로 ‘encyclopedia’ 즉 백과사전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헤겔은 절대정신과 변증법의 논리로
그 당시에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학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철학 체계를 완결 지었다.
이 때문에 헤겔의 철학은 도저히 침몰시킬 수 없는
거대한 함선이 되었다.


헤겔은 더욱 유명해졌고, 마침내 프러시아 제국의
사상적 중심지로 떠오르던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대표작 《법철학》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개인과 사회의 자유가 실현되는 ‘인륜’
베를린 대학 교수 시절의 헤겔은 프랑스 혁명에 열광하던 청년 시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혁명 이후 계속된 혼란을 바라보며 공허한 자유 이념의 한계를 깨닫고, 시대를 구원할 대안을 국가에서 찾았다.

헤겔은 당시 출현한 시민 사회의 혼란은
이념 · 정신의 부재 탓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시민 사회에 부족한 이념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국가라고 생각했다.


헤겔에게 이상적인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가 함께 실현되는 사회이다. 그는 이 공동체를
‘인륜(sittlichkeit, 人倫)’이라 불렀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과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데서 최고의 인륜이다.
국가는 나아가야 할 이념을 제기하면서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가 인륜이 되는 모델을 프로이센에서 찾고,
인륜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입헌군주제8)를
제안했다.

진리는 언제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된다
그 뒤 헤겔은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로,
또 그 시대 최고의 학자로 대접받았다.

헤겔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헤겔학파가 이미
그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졌다.


철학자로서 일찍이 없던 영예를 누리던 그는 예순한 살 때 콜레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헤겔이 죽은 뒤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프로이센 독재의 어용학자에서
자유와 평등의 수호자까지.


헤겔은 하나의 기준만을 가지고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큰 철학자이다.
그가 죽은 뒤 출간된 《헤겔 전집》 각 권 속표지에는 ‘진리는 언제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된다’라는 소포클레스)
의 말이 적혀 있다.


어떤 이들은 헤겔의 절대정신에서
독재를 정당화하는  파시즘의 냄새를 맡으며
그를 인간 소외의 주범으로 비판한다.
실존철학자들이 그들이다.


또 어떤 이는 역사를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보는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사회변혁 이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는 진리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 뒤 전개된 모든 철학에서 헤겔은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 있으면서 계속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헤겔을 공격하건 받아들이건 간에

현대 철학은 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전에 헤겔은 ‘철학자로 태어나다니,
신의 저주를 받은 거야’라는 농담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혼란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시대의 본질을
모색한 축복받은 철학자였다.

저주받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난해한 문체와 방대한 저작들과 씨름해야 하는 후대 학자들이리라.

그만큼 헤겔 철학은 어렵다.
그러나 헤겔은 어려운 만큼 깊은 가치가 느껴지는
묘한 매력을 가진 철학자이다.



철학자의 뒤안길
역사란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

헤겔 철학의 기본 원리는 간단하다.
헤겔의 주장은 한마디로 ‘역사란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무슨 말일까?

조각 작품을 예로 들어 보자.
처음에 조각 작품은 예술가의 머리 속에만 있다.
그러다 예술가가 돌덩어리에 칼을 대는 순간부터
상상에 지나지 않았던 작품은 점점 눈에 보이는 실체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절대정신의 자기실현’도 이와 똑같다.
절대정신이란 ‘신의 섭리’와 비슷하다.
절대정신은 처음에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역사를 통해 점점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간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추상적인 이상이
역사를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사례였다.

이와 같이 절대정신은 마치 조각가가 머리 속의 구상을 돌덩이를 파내며 구현해 나가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모습을 역사 속에 점점 더 완성해 나간다.


조각가는 결국 처음 상상했던 모습대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와 똑같이 절대정신도 마침내는 변화와 투쟁의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완성시킬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정신이 역사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바동거리고 살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시저,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영웅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이성의 간교한 지혜(간지:奸智)가 작용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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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는 먹고살기 위한 자신의 고단한 일이 세계 경제 변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
그래도 변화는 이런 세세한 작업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때가 맞지 않으면’ 결코 영웅이 출현할 수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절대정신은 개개인과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거다.

//                 안광복, 《철학, 역사를 만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