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에 요양 병원에 계신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생긴다는 얘길 들었다.
얼마 전, 아버지를 잃은 지인 역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주무시다가 큰 고통 없이 가셨으니 여한은
없다고 했다.
해가 바뀌기 전, 100세를 앞두었던 그의 아버지는
면회를 올 수 없는 5개월 된 증손주의 자동재생
영상을 실제 아이로 착각해 어르고 달래며
종일 봤다.
호스피스에 근무하며 죽음을 늘 곁에서 지켜본
이의 블로그에서
“임종 전에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릴 수 있지만 본인은 이미 의식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글을 봤다.
하지만 청각은 마지막까지 살아있으니 떠나는 사람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들려주라고 했다.
지인에게 그 얘길 전했더니, 자신은 임종 때
“아버지, 사랑해요” 같은 말은 차마 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 세대가 그렇듯 그들 부자 역시 살가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대신 그는 “정말 수고하셨어요”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세상과 곧잘 불화하는 성정을 가진 아버지가 자식들의 밥을 위해 얼마나 많은 굴욕을 지불했을까
생각하면 ‘수고’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는 것이다.
‘수고하셨다’는 아버지에 대한 최고 존경의 표시라고도 했다.
살면서 그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은
“밥 먹었니?”와 “밥은 먹고 다녀라”였다.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나,
아버지의 입에선 ‘밥’이 나왔다.
안부를 묻는 전화기에 대고,
집을 나서는 뒤통수에 대고 했던 지겨운
그 ‘밥 타령’이 실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는 걸 이젠 알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깨달음은 늘 늦다.
죽기 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말은 그렇게 차고
넘친다. 그러니 써놓고 몇 번이고 새길 일이다.
벽암록에는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라는 말이 있다.
삶의 기준이 ‘저기’가 아니라 ‘여기’,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번 사는 생의 마지막에 나는 또 어떤 말을 주고
받게 될까. 모든 삶은 편도다.
[백영옥 소설가]
무뎌지는 슬픔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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